[2008년 제4호]
이스라엘의 양심, 이츠하크 라오르
일시 : 2006년 11월 5일
장소 : 독일 비퍼스도르프성 예술인의 집
대담 진행 : 전승희(본지 편집위원)

베를린 근교의 비퍼스도르프성 예술인의 집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좀 지난 이른 오후였다. 선생은 청바지에 낡은 잠바를 걸친 수수한 차림으로 손수 마중을 나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활달한 청년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약간 벗겨진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은 연륜과 고난의 세월을 얼핏 드러내기도 했다. 히브리어로 작품을 쓰는 선생은 영어로는 원하는 바를 다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하였으나 영국의 신문 등에 영문으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는 만큼 대화는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되었다.
전승희 독일과 유태인의 관계는 가깝고도 먼, 가장 어려운 관계 같습니다. 유태인들이 독일문화 형성에 기여한 역사가 있는 반면에 이차대전 중에는 독일인들이 조직적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바로 그런 나라에서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된 것이 역설적이지만 우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독일에 머무시게 된 경위를 들으며 말문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라오르 이 고장은 원래 독일 통일 전 동독에 속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저택은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던 아킴 폰 아르님과 베티나 폰 아르님 부부가 살던 집이었다고 합니다. 남편 아킴은 낭만주의 시인인 브렌타노와 함께 독일 각 지역의 민요를 수집해 네 권의 책으로 출판한 바 있고, 아내인 베티나는 괴테와 주고받은 편지를 출판해 남편보다 더 유명했다고 합니다. 통독 후 1992년부터 이 저택을 문화적으로 뜻있는 사업에 쓰고자 하는 취지로 기금을 조성해 음악, 미술, 영화,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창작가들에게 생활보조비와 작업실 공간을 최고 5개월까지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현실이나 제 경제적 형편이 다 집필에 전념하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거든요. 작품만으로는 생계가 힘들고 그래서 서평이며 논설 등을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하는데, 그러다 보면 작품 쓸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기 있어도 현실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아주 모른 척하고 있을 수도 없고, 또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이 쉽지는 않군요.
전승희 가족이 이스라엘에 계시군요. 체류기간 동안 서로 방문할 기회는 있으신지요?
라오르 방문도 비용 때문에 만만치가 않습니다. 마침 제가 꼭 가야 할 일이 생겨 다음 주 이스라엘에 잠시 다녀올 예정입니다. 가족은 형법학자인 아내와 늦게 자식을 보아 아직 십대인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성장기에 있는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못 보내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전승희 이 예술인의 집에 현재 체류하고 있는 창작인들은 모두 몇 분이나 되는지요? 기금의 취지가 창작인들 간의 상호교류라든가 연주회, 전시회, 강연회 등을 통해 지역문화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던데, 그간의 경험이 궁금하군요. 일요일이면 행사 같은 것이 있을 법도 한데 무척 조용하네요.
라오르 이곳은 농촌지역인데 통독 후 젊은이들이 베를린을 비롯한 대도시로 대거 빠져 나가고 지금은 노인들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요. 빈 집도 많고. 농부들의 입장에서는 통일 이후 기대했던 서방의 풍요는 여전히 멀고 과거에 국가가 보장해주었던 기본권들은 거의 사라진 상황이라고 합니다. 지역민들을 상대로 행사를 하려 해도 지역민 자체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베를린 근교라 해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베를린에서 오는 청중을 기대하기도 힘들고요. 현재 머물고 있는 창작자들이 십여 명인데 상호간 대화나 발표할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단기 프로그램이라 머무는 동안 한두 번 인사 나누면 떠나기 십상이지요. 주변에 논밭 외에 아무런 문화시설이나 하다못해 상점 같은 것도 없고, 차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 아니면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셈이고, 어떤 때는 감옥생활이 따로 없구나 싶기도 해요. 물론 저한테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간 이런 생활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 그 사회 속의 사람들을 떠나서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위터보그 역 대합실이나 택시로 지나쳤던 마을 중심가의 상점들이나 거리에서도 인적이라곤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예술인의 집까지 오는 택시도 대합실 매점에서 전화로 부른 뒤 삽십 분이나 기다려서야 나타났다. 필자로서는 말로만 전해 듣던, 사회주의 붕괴 후 더 열악해진 구사회주의권 국가 민중의 삶의 일단을 목격한 셈이다. 20세기 후반 한국 산업화에 수반된 농촌의 황폐화를 근대화나 산업화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동독의 사례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산물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전승희 선생님의 약력을 보면 직접 문학과 관련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정부당국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 용기 있게 싸워온 분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선생님의 남다른 정의감이나 용기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프로이드의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인격 형성에 부모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그리고 선생님의 성장기에 대해 좀 여쭤봐도 될까요? 선생님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셨지만 부모님은 이민을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라오르 아버지는 독일 노동자로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셨고, 히틀러와 나치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던 1930년대에 시온주의의 물결을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오신 분입니다.
전승희 다행히도 나치에 의한 박해는 면하셨군요.
라오르 유럽에 남았던 유태인들이 당했던 고난과 학살은 피하셨지만, 당신 자신은 1939년 이차대전 발발 후 영국군에 자원해 참전해서 나치 독일에 대항해 싸우셨지요. 독일에 점령군으로 들어가셨을 때 영국군이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니까 독일인들이 놀랐다고 해요. (웃음)
전승희 어머님은요?
라오르 어머니는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역시 이차대전 전 이민을 오셨습니다. 사회사업가로 일하셨던 어머니는 당신이 담당하는 분들을 만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시면 그분들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경우가 참 많았어요. 어려운 분들의 사정에 공감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분이셨지요. 저도 실은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 태생은 아니에요. 종전 후 원래는 팔레스타인의 영토였던 파르데스 하나에서 태어났는데 제가 태어난 지 한 달 후 그곳이 이스라엘에 합병당해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된 것이지요.
전승희 아버님께서 독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버님과 독일 사회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좀더 듣고 싶군요.
라오르 아버지는 독일에서 노동자로 지내던 1920년대에 나치에 저항적이셨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나치의 선거포스터를 떼어내는 것도 그 활동 중 하나였다고 들었습니다. (웃음) 이와 관련해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독일인들이 모두 나치였다는 식의 통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독일에서도 도시의 노동자들은 결코 히틀러에게 표를 던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흔히 과거 역사를 단순하게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단순화는 얼핏 보기엔 사회 전체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집단과 개인의 책임을 모두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예를 들어볼까요? 흔히들 독일정부의 반복적 사과를 보고 독일이 과거를 진지하게 반성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독일인들이 모두 나치신봉자, 동조자, 협력자는 아니었거든요. 실제로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에 저항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했어요. 그런데 과거를 반성한다고 하는 독일에서 바로 이런 자국민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일은 드뭅니다. 가령 히틀러의 전기를 보면,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기계공이 히틀러를 암살할 목적으로 그가 연설하기로 예정된 날 뮌헨 공원에 사제폭탄을 장치한 사건이 있습니다. 불운하게도 히틀러가 일정을 취소하는 바람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폭탄은 예정대로 폭파했고 그 기계공은 체포되어 뷔헨발드의 강제수용소에 보내져 6년간 강제노동을 하다가 1944년 총살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용감한 행동이 하다못해 그의 이름을 따서 거리의 이름을 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라도 기념되기는커녕 그 기계공의 출신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그의 가족을 백안시했다고 해요. 그런 행위를 기억하지 않으면서 과거를 싸잡아서 반성한다고 하면 도대체 무엇을 무슨 이유로 반성한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승희 그런 사례도 있었군요. 과거 역사를 일반화하지 말고 구체적인 개인의 행위를 분별적으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데 동감합니다.
라오르 역사란 구체적 개인의 구체적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체적 개인이 매순간 내리는 도덕적, 정치적 선택의 행위가 이루어져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고, 그런 이해 없이 역사를 미래의 거울로 삼는 건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의 어떤 행위가 모여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가져왔고, 어떤 개인의 어떤 행위는 그것을 저지하거나 지연시켰는가를 알아야 앞으로 우리 개개인이 어떤 도덕적,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겁니다. 과거나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입니다.
전승희 내전을 거친 후 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에서 ‘국방’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독재 치하에서 살았던 제 경험으로 미루어 이슬람국가에 포위당한 형국인 이스라엘에서 ‘국민총화’가 거의 신성불가침의 가치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키부츠운동도 그런 집단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국민에게 병역의무가 있는 나라라는 점도 그와 무관할 것 같지 않고요. 그런 나라에서 선생님이 1972년 점령지에서의 군복무를 거부하신 일은 보통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실 때의 정황이나 심경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라오르 저는 1966년에서 1969년에 이르는 3년 동안 군에 복무했습니다. 원래 의무복무 연한이 2년 반이었는데, 제 복무기간 중인 1967년에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를 기습공격해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골란고원 등을 점령한 소위 ‘6일 전쟁’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복무기간이 3년으로 연장되었지요. 제 경우는 바로 이 군복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정권의 억압성을 목격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유태인과 아랍계 학생이 함께하는 그룹 활동을 하면서 베이루트의 비르자이트대학의 학생들과도 연대활동을 했어요. 졸업 후에는 시를 발표하면서 신좌파 경향의 청년단체에서 활동했지요. 점령지에서 군복무를 거부한 일은 저 혼자 결정한 영웅적 결단은 아니고 저희 그룹에서 함께 결정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의 승리로 기고만장해서 공격주의적인 담론과 태도가 판을 치던 시기였거든요. 따라서 전쟁에 이르기 전에 그 기도를 중단시키자는 것이 저희들이 정한 목표였는데, 1972년 다음해 벌일 ‘욤 키푸르 전쟁’을 준비하면서 예비군을 대대적으로 소집해 점령지구 복무를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단체 소속 회원 다섯 명이 함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이지요.
전승희 군복무 동안 오히려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되셨고, 그 각성이 결국 군복무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군요.
라오르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정치적 거부는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우리 세대의 경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자라 복종을 당연히 여겼지만, 도시중산층의 40퍼센트 정도가 구미 여행이나 생활 경험이 있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구미식 자유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라고 있지요. 이런 젊은이들에게 명령 절대복종 같은 스파르타식 사고가 통할 리가 있나요. 가령 이스라엘 장성의 경우 엄청난 월급을 받고 은퇴 후에는 200만 달러의 퇴직금에 연금, 그리고 국영기업체나 방위산업체 등지에 이사 같은 자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스라엘 현 체제의 기둥이라 할 만한 사람들의 자녀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구미식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자라며 음악가나 미술가 등 군인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꿈꾸고 국민개병제에도 불구하고 군대에는 물론 갈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매복 중에 길 건너 소위 ‘적 진영’ 피자집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다든지, 군무 중 인터넷으로 주식을 사고팔다가 적발된 사례 등이 있습니다. 종교와 군대를 중심으로 한 전시동원체제와 세속적이며 서구적인 근대국가라는 자부심 사이의 모순이 나은 결과인데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현 체제가 아무리 우겨봐야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1982년에 개전해 질질 끌었던 1차 레바논 전쟁이나 이번 여름 있었던 2차 레바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한 것도 그런 구조적 원인에 기인합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스라엘에 있어 레바논은 미국에 있어 베트남과도 비슷합니다. 실패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매달림으로써 더 큰 패배로 이어지고, 모두에게 고통과 피해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말이죠.
전승희 아무리 정의감이 강한 부모님이라도 감옥도 불사하고 투쟁하는 자식을 보기가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선생님의 활동으로 부모님과 갈등은 없으셨는지요?
라오르 1970년대에는 부모님과 갈등이 많았어요. 하지만 1972년 군복무거부사건이 났을 때 아버지는 당신의 사회주의적 뿌리에 충실한 태도를 보이셨어요. 사건 직후 불구속기소 상태에서 6개월 감옥행과 비싼 벌금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아버지와 카페에 마주앉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벌금을 조달해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다른 네 명의 동지는 어떡하느냐고 반문했지요. 아버지께서는 평등을 신봉하던 사회주의자답게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제 결정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전승희 그럼 결국 6개월 징역형을 사셨나요?
라오르 마침 운이 좋았는지 국방장관이 갑자기 모두 사면 한다고 발표를 해서 저와 제 친구들 모두 감옥행을 면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 뒤 몇 년 안 돼 1976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너무 속을 많이 상하셔서 그러셨다 싶어 늘 가슴이 아픕니다.
전승희 가슴 아픈 일이군요. 그렇지만 틀림없이 용기 있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이제 말머리를 작품 활동으로 돌려보지요. 작가가 되기로 결정하신 것은 언제쯤인가요?
라오르 제 전공이 연극과 문학이었고, 대학 재학 중이나 졸업 후 다른 활동 중에도 늘 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의식적으로 작가가 되어야지 결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요. 제 주된 관심사는 일관되게 정치적인 것이었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룬 문학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어요. 그러다가 1980년대 이래 미국문학, 그러니까 앨런 긴즈버그라든가 애드리언 리치 등의 작가들이 소개되면서 이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문학은 문학과 정치에 전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전통을 가진 문학입니다.
전승희 선생님의 문학작품이 체제를 풍자·비판해서 체제와의 충돌이 잦으셨고, 그중에서도 1984년 희곡 「에프라임 군대로 돌아가다」가 당국의 검열로 무대에 올려지지 못하자 대법원에 제소해 승소하신 일화는 유명한데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라오르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 1982년의 1차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 사회분위기가 그 이전과 극단적으로 바뀌게 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그 전쟁 이전엔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전쟁에 반대했어요. 모두들 전쟁이 더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을 내다보았고 따라서 반대와 저항이 사회적인 합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전쟁을 일으키자 이전에 강력한 비판을 했던 사람을 포함해서 전 사회가 전시동원체제로 돌변해 정부를 지원했어요. 지식인들까지도. 제가 아는 교수 중에 사르트르를 전공해서 평소 사르트르의 저항사상을 가르친 이가 있는데 그 사람도 침묵을 선택하더군요. 저로서는 그걸 이해하거나 용납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이유로 그랬을 거다 하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용납은 안 됩니다. 그 후 계속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정부의 정당화 논리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고착되었어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지식인들 스스로 체제에 흡수되어버리니까 결과는 독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돌변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84년 발표한 희곡의 공연권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권위 있는 큰 극장에서 샀는데 당국의 검열로 공연을 못하게 되었어요. 이 검열이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저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법원에 제소를 했고 3년여에 걸친 힘든 싸움 끝에 희곡에 대한 검열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냈지요. 영화는 여전히 검열할 수 있지만. 이게 ‘라오르 대 국가’라고 해서 법학계에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례가 된 모양입니다. 그때 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름을 구글로 검색하면 엄청난 항목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승소를 했다고 해도 워낙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 탓에 극장에서는 무대에 올릴 생각이 없어졌어요. 그래 제가 자비를 들이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데 만족해야 했지요.
전승희 작품 내용이 궁금하군요. 혹시 영역은 되어 있는지요?
라오르 이미 되어 있지만 출판은 안 되어 있어요. 번역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스라엘에는 정부 산하 ‘번역원’이 있고 웬만한 주요작품은 여기서 번역됩니다. 이런 프로젝트에서도 제 작품은 물론 제외되어 왔지요.
전승희 양심적인 작가에 대한 박해가 새삼스러운 현실은 아니지만 정말 개탄스럽군요.
라오르 그런 것 따지기로 하면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령 1996년 유럽의 노트르담에서 세계작가회의가 있었어요. 저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 행사가 참여국가들의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초대받은 것을 안 이스라엘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미끼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참여하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전승희 혹시 육체적인 폭력의 대상이 된 일도 있으신지요?
라오르 글쎄요, 뭐, 1979년 한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우익 조직원들이 여러 명 한꺼번에 달려들어 저를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 초주검이 되도록 때린 뒤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회복에 한참 걸렸고 그 이후로 늘 허리가 결리고 아픈 증상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런 일이야 뭐 일상사지요.
전승희 그런 탄압이 일시적으로라도 본인의 신념과 활동에 대한 회의나 좌절감을 가져오지는 않았을지 궁금하군요.
라오르 사실 1984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법정싸움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전 사회적 여론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외로웠고, 그렇지 않아도 글로 먹고 살기 힘든데 법정싸움에 매달리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정말 힘들었어요. 건강도 나빠지고. 당시에는 정말 심각하게 이런 식의 글쓰기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고 아내와도 상의했지요. 이때 결코 좌절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아내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승희 그렇게 의지를 꺾지 않고 법정싸움에서도 오히려 승리를 거두면서 꾸준히 글을 발표하셔서 1990년에는 이스라엘의 수상이 주는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셨는데, 이때 수상이 서명을 거부했고 선생님도 수상을 거부하시는 사건이 있었지요?
라오르 이 상이 시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7년에 한 번 정도인데 그 이전과 이후 언제나 막판에 뭔가 저를 젖힐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더라고요. (웃음) 막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는 일단 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고령의 제 아버지께 자식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 수상 거부 후 아버지와 마주앉아 솔직히 말씀드렸지요.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나라도 그 수상과 악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시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시더군요. 그래도 저로서는 아버지께 그만한 선물도 드릴 수 없는 현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늦은 오후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떨어져 응접실은 더욱 추워졌다. 필자는 도착 후 벗어놓았던 머플러며 외투를 차례로 도로 챙겨 입었다. 그 모습을 본 작가는 응접실의 난방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서 직접 근처 다른 공용 공간의 라디에이터를 확인해보고 돌아와 방을 옮기자고 했다. 응접실과 식당 사이의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는 이어졌다.
전승희 11월 초면 아직 초겨울인데, 이곳 날씨는 유난히 더 춥군요.
라오르 겨울 날씨가 온화한 이스라엘에 사는 저로서는 이곳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군요. 계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히브리어에 사계절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는 것도 유럽어의 영향입니다. 아시겠지만 현대 히브리어는 고대 히브리어와는 달리 새로 발명된 언어입니다.
전승희 현대 히브리어의 형성사에 대해 저도 잘 모르고 독자들 중에도 모르는 분이 많을 테니 좀 부연해서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라오르 원래 아랍어와 구문구조가 같은 고대성서 히브리어와는 달리 현대 히브리어는 구문구조가 유럽어와 더 유사합니다. 시오니즘 운동과 함께 1880년대에 고대 히브리어에서 아랍어적 요소를 제거하는 ‘정화’ 운동이 일어났지요. 사실 유럽의 각지에 흩어진 유태인들이 그때까지 천 년 이상 사용해온 언어는 ‘이디시’였는데, 고대성서의 히브리어가 이 이디시를 대체하는 새로운 언어로, 일종의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언어를 고대언어가 ‘부활’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창안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산물이기도 하고요. 시오니즘과 청교도주의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연구가 많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그런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지요.
전승희 바로 그 히브리어로 작품을 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라오르 예, 제 부모님에게는 이디시가 모국어이지만 제게는 바로 이 새롭게 창안된 언어인 현대 히브리어가 모국어입니다. 바로 그 ‘부흥’운동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고, 그 언어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현대 히브리어로 재창안되기 이전 고대성서 히브리어에서 중세 히브리어를 거쳐 종교적인 언어로 발전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의미의 층위가 여러 겹이라 문학적으로 풍부하고 유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의 현재 의미와는 다른 역사적 의미의 층위들을 활용함으로써 현재의 의미와 논리를 뒤집을 수 있고 거기서 아이러니가 창출되는 것이지요.
전승희 현대 히브리어가 서구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라는 지적이 흥미롭습니다.
라오르 이건 단순한 언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유태인과 다른 피식민 민족 사이의 차이는 대부분 다른 피식민 민족들이 서구적 식민화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한 데 비해 유태인들은 적극적으로 그 서구화의 호명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2세기쯤 전 서구에서 ‘계몽사상’, 즉 서구와 다른 문화와 문명을 모조리 서구식으로 바꾸려는 기획이 탄생했고, 유태인들은 바로 그런 기획의 첫 대상으로 선정되어 변화를 요구받았던 거예요. 서구인처럼 생각하고, 서구인처럼 행동하고, 서구인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서구인처럼 생기라는 요구를. 가령 이슬람교도들은 한 번도 그런 요구를 받아들인 적이 없는 반면 유태인들은 바로 그런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말살시킨 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1897년 친할아버지께서 동구에서 독일로 이민한 직후 찍으신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독일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셨어요. 어렸을 때 뵌 할머니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날 아랍여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셨지요. 머리에는 그 ‘악명 높은’ 머리스카프를 쓰셨고 옷차림도 요새 아랍여성들과 아주 똑같았거든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서는 완전히 지워진 역사입니다.
전승희 서구의 ‘계몽사상’이 서구인처럼 변화하라는 ‘호명’이라는 건 틀림이 없지요. 그리고 아랍 여성이 착용하는 차도르에 대한 최근 구미에서의 소동에서 보듯 서구인처럼 변화하는 지표의 하나로서 겉모습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외모의 지배체제’라고나 할까요?
라오르 맞아요. 히틀러의 전기를 보면 벨로루시를 방문하고 돌아온 히틀러가 기쁨에 넘쳐 “그 사람들이 우리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금발에 후리후리한 체격에”라고 말했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생각할수록 분명한 것이 유태인이야말로 식민화된 민족 중에서 자신이 식민화되었다는 의식조차 없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시오니즘의 아버지인 헤르첼의 『유태인의 국가』라는 책에 보면 아예 드러내놓고 “우리 유태인의 나라가 남쪽에서 진출하는 야만인들로부터 유럽을 방어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도 바로 그런 서구적 식민화에 대한 의지의 산물입니다. 식민화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한 것이지요. 그 점은 이스라엘의 미디어를 구미의 미디어와 비교 대조해볼 때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국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이스라엘 미디어는 구미 미디어의 논리를 거의 그대로 베끼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구미를 추종하는 것이 우리의 리비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 서구문명의 제국주의적 성격, 이스라엘 당국과 주류의 무분별한 서구추종에 대한 라오르 선생의 비판은 신랄했다.
라오르 서구는 근대 들어 한 번도 자신과 다른 것의 존재를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몽사상에 근거한 제국주의적 기획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로는 탈현대주의니 탈제국주의, 탈구조주의 등을 내세우지만. 한번은 런던에서 그 이름을 대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 만한 진보적 사상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화 중에 내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가 결혼을 비롯해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니까 그가 말하기를 ‘유태인의 문제는 유태인을 계몽사상으로 도약시킬 볼테르 같은 사상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서구 계몽사상의 문제점에 대한 최신 사상의 그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정말 믿기 힘들었습니다.
전승희 동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서구의 식민화대상으로 보신다는 관점이 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지에 선생님의 작품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작가들의 작품을 싣는다는 사실에 유태인이든 아니든 놀라움을 표시하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과연 이스라엘처럼 서구화된 나라를 아시아의 일부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죠.
라오르 지리로 보아도 그렇고 역사로 보아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있을까요? 작가로서 제게 구미의 독자들보다 아시아의 독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유럽의 매체에는 기고도 하고 미국이나 서구의 다른 나라들도 방문했지만 이스라엘 주변국을 제외한다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방문해본 적도 없고 그 문학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를 거치지 않은 아시아인끼리의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아시아》지의 기획은 정말 의미 있고 저 개인적으로도 반가운 일입니다. 아시아인들의 광범위한 호응으로 이 기획이 더욱 번창해서 구미의 담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구심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전승희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말머리를 선생님 작품의 풍자적 성격으로 돌려볼까요? 단편 「역사에 관한 성찰」은 진지한 수필이나 논설의 형식을 패러디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주류의 논리를 전복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일용할 양식」 같은 시도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주기도문’을 패러디하면서 남성중심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모성성과 돌봄의 사상을 내세우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고요. 지배적 담론을 빌려오되 비판적 시각을 통해 내부로부터 전복하는 형식이 문학적 언어에 대한 러시아의 학자 바흐친의 이론을 연상시키던데요.
라오르 바로 보셨습니다. 문학의 언어가 담론간의 상호조명이자 대화라고 보는 바흐친의 이론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다양한 담론을 한 문장으로 끌어안아 병치함으로써 그것들끼리 서로 조명하게 하고 비판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현실을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제가 작품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형화된 지배적 담론을 이런 담론간의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면 지배담론의 일면적 성격을 폭로할 수 있지요.
전승희 그 같은 담론의 중요한 특징은 바흐친도 논했다시피 ‘웃음’인데요.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읽은 몇몇 시라든가 또 산문에서 ‘웃음’은 핵심적인 요소 같더군요.
라오르 제 생각에 우리의 ‘자아(에고)’는 최악의 이야기꾼입니다. 자아의 진지함은 이야기를 진부하고 지루하며 뻔하고 감상적이며 또 현학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진지함과 책임감은 상대적으로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은 무책임하지요. 이 무책임한 욕망이 바로 풍자와 웃음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웃음이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진실된 전복의 세력이지요. 오늘날 구미의 문화가 이런 ‘웃음’의 활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은 가령 미국의 시트콤에서 독자의 웃음을 자연스럽게 창출하는 대신 ‘웃음 박스’를 통해 억지로 웃음을 유도하는 현상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한 가지 이데올로기로 획일화된 사회의 문화는 진정한 욕망과 웃음을 잃고, 웃음조차도 주류사회에 통합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식의 사회는 아무리 다양성을 내세워도 실은 전체주의적인 사회에 가깝습니다. 한 가지 이데올로기로 전체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이 간접화된 증거는 웃음박스만이 아니고 가령 미국의 주류 담론이 집착하는 ‘가족적 가치’가 실제 가족 내부가 아닌 투표함에서만 존재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승희 미국에서 텔레비전이나 다른 대중매체를 보며 늘 느끼던 것인데 아주 정확하고 예리한 지적이신 것 같습니다. 좀 진부한 질문을 드려도 된다면, 선생님 문학의 스승이나 모델로 어떤 분을 꼽을 수 있을까요?
라오르 소설가로는 발자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와 포크너 등을 들 수 있고, 극작가로서는 브레히트, 영화감독으로 고다르 등을 좋아합니다. 이런 대가들의 훌륭한 점은 그들이 정형화된 틀을 깨고 새로운 인물을 발명하고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출판시장과 대중매체가 이미 정형화된 인물을 대중의 구미에 맞게 포장만 새로 해서 제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인물과 이야기가 시장의 요구에 따라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러니까 인물과 이야기는 그 내용이나 깊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소비자를 위해 상업적으로 제조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공적인 담론은 피상적이고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것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아주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고 봅니다.
전승희 이스라엘의 작가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홀로코스트가 빠질 수 없겠는데요. 한 민족을 완전히 말살시키겠다는 어마어마한 범죄적 기획을 진보된 현대기술을 동원해 실행에 옮김으로써 6백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유태인을 학살한 이 사건이 유태인들과 인류 전체에 남긴 상처가 과연 치유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하면 마치 피해자를 비판하는 형국이 된 것 같아요.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모든 비판을 침묵시키는 면죄부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라오르 홀로코스트의 범죄성에 대해서야 그 누구도 이견이 있을 수 없겠고 그 실상을 변별적으로 밝히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연 누가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당시 ‘거기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 심지어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비판했던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에서 중요하게 대두한 것은 1980년대 말엽에 가서이고 그전에는 학살당한 유태인들을 창피스러운 친척 정도로 여겼습니다. 희생을 당했다는 사실이 곧 ‘약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져 가능하면 모른 척하려고 했지요.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자’였어요. 학교에서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히브리어가 모국어이고 홀로코스트를 겪은 후 이민 온 학생들은 히브리어가 서툴러서 서로 겉돌고 끼리끼리 따로 어울렸지요.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들어 이스라엘 정부에서 그들을 병합시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들을 위해서 말하다가 이어 그들의 대변인을 자처하더니 점차 우리가 곧 그들인 것처럼 자임하고 나선 것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모두 아우슈비츠로 수학여행을 갑니다. 독일 정부가 이스라엘 정부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배상을 했고요. 희생당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배상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처음에는 무시당하고 이어 상징적 역할을 하다가 지금은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바뀐 셈입니다. 현재는 홀로코스트가 일종의 정치산업을 창출하는 중심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승희 1980년대 말 들어 이런 변화가 일어난 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라오르 이유야 분명한 것 아닐까요? 공산주의권이 존재할 동안에는 구미에서 서방은 선이요 공산주의 동구권은 악이라는 도식이 가능했는데,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지고 나서 더 이상 그런 도식이 성립되지 않게 되었거든요. 이제 모두가 선이고 악은 나치에게서만 그러니까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선하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이라크를 침공해서 대량살상을 하든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을 침공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든. 나치가 한 일에 비할 바가 못 되니까. 구미인들이 더 이상 내부의 선악을 구별하고 싶지 않은 세계에서 홀로코스트가 아주 기묘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승희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 구미, 특히 미국의 주류세력이 ‘역사의 종언’을 공언하고 인류에게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굴면서 기고만장해진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동구권이 무너지기 전에 이루어졌던 진보적 개혁이 상당 정도 후퇴했고, 이라크 전쟁이나 이란, 북한 등을 상대로 한 위협을 보더라도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변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지요. 바로 이것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의 배경이기도 하다는 지적은 새롭지만 설득력이 있군요.
홀로코스트의 짐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 미국인인 루스 클루거가 최근 발표한 자서전에서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미국 유태인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많은 미국 유태인들이 자신들이 유럽에 두고 온 부모와 가족이 희생당한 데 대한 죄의식을 현 이스라엘 정부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으로 보상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스라엘 정부의 침략성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큰형 노릇을 해주는 것이 큰 문제임이 분명하기에 이스라엘인인 라오르 선생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라오르 미국의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칭찬할 만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도울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돈과 여유가 있어 이스라엘을 방문한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미국 유태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해 대중매체나 이스라엘 정부를 지지하는 특정단체가 제공한 것 이상의 지식이 없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 현실을 잘 모르면서 이스라엘 정부나 그와 가까운 매체나 단체의 말만 듣고 같은 민족에게 도움이 되라고 돈을 기부하는데, 바로 그 돈이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도 살상하는 데 사용되는 겁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 정부발행 채권은 외국 채권 중 유일하게 미국의 세금을 면제받는 혜택을 받고 있고요. 미국 내 유태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외람됨을 반성해야 합니다. ‘거기 있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돕는 것은 쉽지만 그게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전승희 이스라엘 정부의 침략성과 억압성은 규탄해 마땅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테러를 내놓고 옹호하는 하마스가 집권을 했는데요.
라오르 저도 물론 테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독립된 국가와 정부를 인정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상태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팔레스타인 집권세력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가 그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하는 악순환을 낳고 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우려할 상황입니다.
전승희 하지만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내부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선생님이나 다른 양심적 지식인들이 일신상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아 노력하고 있으니 그러다 보면 이런 난관이 타개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갈 수 있겠지요. 선생님께서 2년 전 창간해서 편집하고 계시는 잡지 《미타암:문학과 급진적 사상 리뷰》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잡지에 대해 《아시아》의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해주시면 좋겠군요.
라오르 ‘미타암’이라는 제호는 원래 제 아내가 제안한 것인데 발음상으로도 좋고 의미도 이 잡지의 성격에 맞습니다. ‘미타암’에서 ‘미’는 ‘……로부터’라는 뜻이고 ‘타암’은 미각, 취향 등을 뜻하는 말인데 두 단어를 합성하면 중세 히브리어로는 ‘……로 인해’라는 뜻이 되고, 현대 히브리어로는 ‘……를 위해서’라는 뜻이 됩니다. 앞서 이스라엘에서 정치적인 성향의 문학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존재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단어를 내세움으로써 의도적으로 그런 경향에 도전하는 의미가 있지요. 잡지에는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과 에세이 등을 모아 싣고 있는데 국내외 독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8호를 인쇄소에 보냈는데 구체적인 숫자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정기구독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 실린 에세이들을 모아 영역해 출판하자는 제의를 받고 작업 중이기도 합니다. 해외의 구독자 수도 국내 독자 수와 맞먹는 수준이니까 해외의 많은 유태인들이 종교나 국가, 학계와는 거리를 둔 우리 잡지를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 매체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승희 선생님과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선생님을 놓아드려야 할 것 같네요.(웃음) 장시간 좋은 말씀 주신 데 대해 《아시아》의 독자와 편집진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독일에서의 남은 일정 동안 선생님의 창작에 아무쪼록 좋은 결실 있으시기를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라오르 저도 모처럼 관심과 뜻을 함께하는 아시아의 동지를 만나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잡지 《아시아》의 사업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미타암》과 《아시아》 사이에 더 깊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아시아》가 대안적 담론의 생산에 큰 역할을 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먼 길 안녕히 가십시오.
장소 : 독일 비퍼스도르프성 예술인의 집
대담 진행 : 전승희(본지 편집위원)

베를린 근교의 비퍼스도르프성 예술인의 집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좀 지난 이른 오후였다. 선생은 청바지에 낡은 잠바를 걸친 수수한 차림으로 손수 마중을 나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활달한 청년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약간 벗겨진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은 연륜과 고난의 세월을 얼핏 드러내기도 했다. 히브리어로 작품을 쓰는 선생은 영어로는 원하는 바를 다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하였으나 영국의 신문 등에 영문으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는 만큼 대화는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되었다.
전승희 독일과 유태인의 관계는 가깝고도 먼, 가장 어려운 관계 같습니다. 유태인들이 독일문화 형성에 기여한 역사가 있는 반면에 이차대전 중에는 독일인들이 조직적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바로 그런 나라에서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된 것이 역설적이지만 우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독일에 머무시게 된 경위를 들으며 말문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라오르 이 고장은 원래 독일 통일 전 동독에 속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저택은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던 아킴 폰 아르님과 베티나 폰 아르님 부부가 살던 집이었다고 합니다. 남편 아킴은 낭만주의 시인인 브렌타노와 함께 독일 각 지역의 민요를 수집해 네 권의 책으로 출판한 바 있고, 아내인 베티나는 괴테와 주고받은 편지를 출판해 남편보다 더 유명했다고 합니다. 통독 후 1992년부터 이 저택을 문화적으로 뜻있는 사업에 쓰고자 하는 취지로 기금을 조성해 음악, 미술, 영화,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창작가들에게 생활보조비와 작업실 공간을 최고 5개월까지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현실이나 제 경제적 형편이 다 집필에 전념하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거든요. 작품만으로는 생계가 힘들고 그래서 서평이며 논설 등을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하는데, 그러다 보면 작품 쓸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기 있어도 현실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아주 모른 척하고 있을 수도 없고, 또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이 쉽지는 않군요.
전승희 가족이 이스라엘에 계시군요. 체류기간 동안 서로 방문할 기회는 있으신지요?
라오르 방문도 비용 때문에 만만치가 않습니다. 마침 제가 꼭 가야 할 일이 생겨 다음 주 이스라엘에 잠시 다녀올 예정입니다. 가족은 형법학자인 아내와 늦게 자식을 보아 아직 십대인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성장기에 있는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못 보내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전승희 이 예술인의 집에 현재 체류하고 있는 창작인들은 모두 몇 분이나 되는지요? 기금의 취지가 창작인들 간의 상호교류라든가 연주회, 전시회, 강연회 등을 통해 지역문화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던데, 그간의 경험이 궁금하군요. 일요일이면 행사 같은 것이 있을 법도 한데 무척 조용하네요.
라오르 이곳은 농촌지역인데 통독 후 젊은이들이 베를린을 비롯한 대도시로 대거 빠져 나가고 지금은 노인들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요. 빈 집도 많고. 농부들의 입장에서는 통일 이후 기대했던 서방의 풍요는 여전히 멀고 과거에 국가가 보장해주었던 기본권들은 거의 사라진 상황이라고 합니다. 지역민들을 상대로 행사를 하려 해도 지역민 자체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베를린 근교라 해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베를린에서 오는 청중을 기대하기도 힘들고요. 현재 머물고 있는 창작자들이 십여 명인데 상호간 대화나 발표할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단기 프로그램이라 머무는 동안 한두 번 인사 나누면 떠나기 십상이지요. 주변에 논밭 외에 아무런 문화시설이나 하다못해 상점 같은 것도 없고, 차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 아니면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셈이고, 어떤 때는 감옥생활이 따로 없구나 싶기도 해요. 물론 저한테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간 이런 생활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 그 사회 속의 사람들을 떠나서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위터보그 역 대합실이나 택시로 지나쳤던 마을 중심가의 상점들이나 거리에서도 인적이라곤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예술인의 집까지 오는 택시도 대합실 매점에서 전화로 부른 뒤 삽십 분이나 기다려서야 나타났다. 필자로서는 말로만 전해 듣던, 사회주의 붕괴 후 더 열악해진 구사회주의권 국가 민중의 삶의 일단을 목격한 셈이다. 20세기 후반 한국 산업화에 수반된 농촌의 황폐화를 근대화나 산업화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동독의 사례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산물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전승희 선생님의 약력을 보면 직접 문학과 관련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정부당국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 용기 있게 싸워온 분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선생님의 남다른 정의감이나 용기의 배경이 궁금합니다. 프로이드의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인격 형성에 부모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그리고 선생님의 성장기에 대해 좀 여쭤봐도 될까요? 선생님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셨지만 부모님은 이민을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라오르 아버지는 독일 노동자로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셨고, 히틀러와 나치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던 1930년대에 시온주의의 물결을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오신 분입니다.
전승희 다행히도 나치에 의한 박해는 면하셨군요.
라오르 유럽에 남았던 유태인들이 당했던 고난과 학살은 피하셨지만, 당신 자신은 1939년 이차대전 발발 후 영국군에 자원해 참전해서 나치 독일에 대항해 싸우셨지요. 독일에 점령군으로 들어가셨을 때 영국군이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니까 독일인들이 놀랐다고 해요. (웃음)
전승희 어머님은요?
라오르 어머니는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역시 이차대전 전 이민을 오셨습니다. 사회사업가로 일하셨던 어머니는 당신이 담당하는 분들을 만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시면 그분들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경우가 참 많았어요. 어려운 분들의 사정에 공감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분이셨지요. 저도 실은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 태생은 아니에요. 종전 후 원래는 팔레스타인의 영토였던 파르데스 하나에서 태어났는데 제가 태어난 지 한 달 후 그곳이 이스라엘에 합병당해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된 것이지요.
전승희 아버님께서 독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버님과 독일 사회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좀더 듣고 싶군요.
라오르 아버지는 독일에서 노동자로 지내던 1920년대에 나치에 저항적이셨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나치의 선거포스터를 떼어내는 것도 그 활동 중 하나였다고 들었습니다. (웃음) 이와 관련해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독일인들이 모두 나치였다는 식의 통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독일에서도 도시의 노동자들은 결코 히틀러에게 표를 던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흔히 과거 역사를 단순하게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단순화는 얼핏 보기엔 사회 전체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집단과 개인의 책임을 모두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예를 들어볼까요? 흔히들 독일정부의 반복적 사과를 보고 독일이 과거를 진지하게 반성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독일인들이 모두 나치신봉자, 동조자, 협력자는 아니었거든요. 실제로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에 저항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했어요. 그런데 과거를 반성한다고 하는 독일에서 바로 이런 자국민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일은 드뭅니다. 가령 히틀러의 전기를 보면,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의 기계공이 히틀러를 암살할 목적으로 그가 연설하기로 예정된 날 뮌헨 공원에 사제폭탄을 장치한 사건이 있습니다. 불운하게도 히틀러가 일정을 취소하는 바람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폭탄은 예정대로 폭파했고 그 기계공은 체포되어 뷔헨발드의 강제수용소에 보내져 6년간 강제노동을 하다가 1944년 총살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용감한 행동이 하다못해 그의 이름을 따서 거리의 이름을 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라도 기념되기는커녕 그 기계공의 출신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그의 가족을 백안시했다고 해요. 그런 행위를 기억하지 않으면서 과거를 싸잡아서 반성한다고 하면 도대체 무엇을 무슨 이유로 반성한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승희 그런 사례도 있었군요. 과거 역사를 일반화하지 말고 구체적인 개인의 행위를 분별적으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데 동감합니다.
라오르 역사란 구체적 개인의 구체적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체적 개인이 매순간 내리는 도덕적, 정치적 선택의 행위가 이루어져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고, 그런 이해 없이 역사를 미래의 거울로 삼는 건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의 어떤 행위가 모여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가져왔고, 어떤 개인의 어떤 행위는 그것을 저지하거나 지연시켰는가를 알아야 앞으로 우리 개개인이 어떤 도덕적,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겁니다. 과거나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입니다.
전승희 내전을 거친 후 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에서 ‘국방’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독재 치하에서 살았던 제 경험으로 미루어 이슬람국가에 포위당한 형국인 이스라엘에서 ‘국민총화’가 거의 신성불가침의 가치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키부츠운동도 그런 집단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국민에게 병역의무가 있는 나라라는 점도 그와 무관할 것 같지 않고요. 그런 나라에서 선생님이 1972년 점령지에서의 군복무를 거부하신 일은 보통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실 때의 정황이나 심경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라오르 저는 1966년에서 1969년에 이르는 3년 동안 군에 복무했습니다. 원래 의무복무 연한이 2년 반이었는데, 제 복무기간 중인 1967년에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를 기습공격해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골란고원 등을 점령한 소위 ‘6일 전쟁’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복무기간이 3년으로 연장되었지요. 제 경우는 바로 이 군복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정권의 억압성을 목격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유태인과 아랍계 학생이 함께하는 그룹 활동을 하면서 베이루트의 비르자이트대학의 학생들과도 연대활동을 했어요. 졸업 후에는 시를 발표하면서 신좌파 경향의 청년단체에서 활동했지요. 점령지에서 군복무를 거부한 일은 저 혼자 결정한 영웅적 결단은 아니고 저희 그룹에서 함께 결정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의 승리로 기고만장해서 공격주의적인 담론과 태도가 판을 치던 시기였거든요. 따라서 전쟁에 이르기 전에 그 기도를 중단시키자는 것이 저희들이 정한 목표였는데, 1972년 다음해 벌일 ‘욤 키푸르 전쟁’을 준비하면서 예비군을 대대적으로 소집해 점령지구 복무를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단체 소속 회원 다섯 명이 함께 명령에 불복종한 것이지요.
전승희 군복무 동안 오히려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되셨고, 그 각성이 결국 군복무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군요.
라오르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정치적 거부는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우리 세대의 경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자라 복종을 당연히 여겼지만, 도시중산층의 40퍼센트 정도가 구미 여행이나 생활 경험이 있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구미식 자유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라고 있지요. 이런 젊은이들에게 명령 절대복종 같은 스파르타식 사고가 통할 리가 있나요. 가령 이스라엘 장성의 경우 엄청난 월급을 받고 은퇴 후에는 200만 달러의 퇴직금에 연금, 그리고 국영기업체나 방위산업체 등지에 이사 같은 자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스라엘 현 체제의 기둥이라 할 만한 사람들의 자녀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구미식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자라며 음악가나 미술가 등 군인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꿈꾸고 국민개병제에도 불구하고 군대에는 물론 갈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매복 중에 길 건너 소위 ‘적 진영’ 피자집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다든지, 군무 중 인터넷으로 주식을 사고팔다가 적발된 사례 등이 있습니다. 종교와 군대를 중심으로 한 전시동원체제와 세속적이며 서구적인 근대국가라는 자부심 사이의 모순이 나은 결과인데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현 체제가 아무리 우겨봐야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1982년에 개전해 질질 끌었던 1차 레바논 전쟁이나 이번 여름 있었던 2차 레바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한 것도 그런 구조적 원인에 기인합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스라엘에 있어 레바논은 미국에 있어 베트남과도 비슷합니다. 실패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매달림으로써 더 큰 패배로 이어지고, 모두에게 고통과 피해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말이죠.
전승희 아무리 정의감이 강한 부모님이라도 감옥도 불사하고 투쟁하는 자식을 보기가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선생님의 활동으로 부모님과 갈등은 없으셨는지요?
라오르 1970년대에는 부모님과 갈등이 많았어요. 하지만 1972년 군복무거부사건이 났을 때 아버지는 당신의 사회주의적 뿌리에 충실한 태도를 보이셨어요. 사건 직후 불구속기소 상태에서 6개월 감옥행과 비싼 벌금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아버지와 카페에 마주앉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벌금을 조달해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다른 네 명의 동지는 어떡하느냐고 반문했지요. 아버지께서는 평등을 신봉하던 사회주의자답게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제 결정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전승희 그럼 결국 6개월 징역형을 사셨나요?
라오르 마침 운이 좋았는지 국방장관이 갑자기 모두 사면 한다고 발표를 해서 저와 제 친구들 모두 감옥행을 면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 뒤 몇 년 안 돼 1976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너무 속을 많이 상하셔서 그러셨다 싶어 늘 가슴이 아픕니다.
전승희 가슴 아픈 일이군요. 그렇지만 틀림없이 용기 있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이제 말머리를 작품 활동으로 돌려보지요. 작가가 되기로 결정하신 것은 언제쯤인가요?
라오르 제 전공이 연극과 문학이었고, 대학 재학 중이나 졸업 후 다른 활동 중에도 늘 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의식적으로 작가가 되어야지 결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요. 제 주된 관심사는 일관되게 정치적인 것이었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룬 문학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어요. 그러다가 1980년대 이래 미국문학, 그러니까 앨런 긴즈버그라든가 애드리언 리치 등의 작가들이 소개되면서 이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미국문학은 문학과 정치에 전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전통을 가진 문학입니다.
전승희 선생님의 문학작품이 체제를 풍자·비판해서 체제와의 충돌이 잦으셨고, 그중에서도 1984년 희곡 「에프라임 군대로 돌아가다」가 당국의 검열로 무대에 올려지지 못하자 대법원에 제소해 승소하신 일화는 유명한데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라오르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 1982년의 1차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 사회분위기가 그 이전과 극단적으로 바뀌게 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그 전쟁 이전엔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전쟁에 반대했어요. 모두들 전쟁이 더 많은 문제를 낳을 것을 내다보았고 따라서 반대와 저항이 사회적인 합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전쟁을 일으키자 이전에 강력한 비판을 했던 사람을 포함해서 전 사회가 전시동원체제로 돌변해 정부를 지원했어요. 지식인들까지도. 제가 아는 교수 중에 사르트르를 전공해서 평소 사르트르의 저항사상을 가르친 이가 있는데 그 사람도 침묵을 선택하더군요. 저로서는 그걸 이해하거나 용납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이유로 그랬을 거다 하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용납은 안 됩니다. 그 후 계속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정부의 정당화 논리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고착되었어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지식인들 스스로 체제에 흡수되어버리니까 결과는 독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돌변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84년 발표한 희곡의 공연권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권위 있는 큰 극장에서 샀는데 당국의 검열로 공연을 못하게 되었어요. 이 검열이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저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법원에 제소를 했고 3년여에 걸친 힘든 싸움 끝에 희곡에 대한 검열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냈지요. 영화는 여전히 검열할 수 있지만. 이게 ‘라오르 대 국가’라고 해서 법학계에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례가 된 모양입니다. 그때 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름을 구글로 검색하면 엄청난 항목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승소를 했다고 해도 워낙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 탓에 극장에서는 무대에 올릴 생각이 없어졌어요. 그래 제가 자비를 들이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데 만족해야 했지요.
전승희 작품 내용이 궁금하군요. 혹시 영역은 되어 있는지요?
라오르 이미 되어 있지만 출판은 안 되어 있어요. 번역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스라엘에는 정부 산하 ‘번역원’이 있고 웬만한 주요작품은 여기서 번역됩니다. 이런 프로젝트에서도 제 작품은 물론 제외되어 왔지요.
전승희 양심적인 작가에 대한 박해가 새삼스러운 현실은 아니지만 정말 개탄스럽군요.
라오르 그런 것 따지기로 하면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령 1996년 유럽의 노트르담에서 세계작가회의가 있었어요. 저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 행사가 참여국가들의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초대받은 것을 안 이스라엘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미끼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참여하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전승희 혹시 육체적인 폭력의 대상이 된 일도 있으신지요?
라오르 글쎄요, 뭐, 1979년 한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우익 조직원들이 여러 명 한꺼번에 달려들어 저를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 초주검이 되도록 때린 뒤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회복에 한참 걸렸고 그 이후로 늘 허리가 결리고 아픈 증상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런 일이야 뭐 일상사지요.
전승희 그런 탄압이 일시적으로라도 본인의 신념과 활동에 대한 회의나 좌절감을 가져오지는 않았을지 궁금하군요.
라오르 사실 1984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법정싸움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전 사회적 여론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외로웠고, 그렇지 않아도 글로 먹고 살기 힘든데 법정싸움에 매달리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정말 힘들었어요. 건강도 나빠지고. 당시에는 정말 심각하게 이런 식의 글쓰기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고 아내와도 상의했지요. 이때 결코 좌절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아내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승희 그렇게 의지를 꺾지 않고 법정싸움에서도 오히려 승리를 거두면서 꾸준히 글을 발표하셔서 1990년에는 이스라엘의 수상이 주는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셨는데, 이때 수상이 서명을 거부했고 선생님도 수상을 거부하시는 사건이 있었지요?
라오르 이 상이 시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7년에 한 번 정도인데 그 이전과 이후 언제나 막판에 뭔가 저를 젖힐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더라고요. (웃음) 막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는 일단 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고령의 제 아버지께 자식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 수상 거부 후 아버지와 마주앉아 솔직히 말씀드렸지요.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나라도 그 수상과 악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시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시더군요. 그래도 저로서는 아버지께 그만한 선물도 드릴 수 없는 현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늦은 오후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떨어져 응접실은 더욱 추워졌다. 필자는 도착 후 벗어놓았던 머플러며 외투를 차례로 도로 챙겨 입었다. 그 모습을 본 작가는 응접실의 난방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서 직접 근처 다른 공용 공간의 라디에이터를 확인해보고 돌아와 방을 옮기자고 했다. 응접실과 식당 사이의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는 이어졌다.
전승희 11월 초면 아직 초겨울인데, 이곳 날씨는 유난히 더 춥군요.
라오르 겨울 날씨가 온화한 이스라엘에 사는 저로서는 이곳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군요. 계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히브리어에 사계절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는 것도 유럽어의 영향입니다. 아시겠지만 현대 히브리어는 고대 히브리어와는 달리 새로 발명된 언어입니다.
전승희 현대 히브리어의 형성사에 대해 저도 잘 모르고 독자들 중에도 모르는 분이 많을 테니 좀 부연해서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라오르 원래 아랍어와 구문구조가 같은 고대성서 히브리어와는 달리 현대 히브리어는 구문구조가 유럽어와 더 유사합니다. 시오니즘 운동과 함께 1880년대에 고대 히브리어에서 아랍어적 요소를 제거하는 ‘정화’ 운동이 일어났지요. 사실 유럽의 각지에 흩어진 유태인들이 그때까지 천 년 이상 사용해온 언어는 ‘이디시’였는데, 고대성서의 히브리어가 이 이디시를 대체하는 새로운 언어로, 일종의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언어를 고대언어가 ‘부활’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창안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산물이기도 하고요. 시오니즘과 청교도주의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연구가 많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그런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지요.
전승희 바로 그 히브리어로 작품을 쓰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라오르 예, 제 부모님에게는 이디시가 모국어이지만 제게는 바로 이 새롭게 창안된 언어인 현대 히브리어가 모국어입니다. 바로 그 ‘부흥’운동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고, 그 언어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현대 히브리어로 재창안되기 이전 고대성서 히브리어에서 중세 히브리어를 거쳐 종교적인 언어로 발전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의미의 층위가 여러 겹이라 문학적으로 풍부하고 유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의 현재 의미와는 다른 역사적 의미의 층위들을 활용함으로써 현재의 의미와 논리를 뒤집을 수 있고 거기서 아이러니가 창출되는 것이지요.
전승희 현대 히브리어가 서구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라는 지적이 흥미롭습니다.
라오르 이건 단순한 언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유태인과 다른 피식민 민족 사이의 차이는 대부분 다른 피식민 민족들이 서구적 식민화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한 데 비해 유태인들은 적극적으로 그 서구화의 호명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2세기쯤 전 서구에서 ‘계몽사상’, 즉 서구와 다른 문화와 문명을 모조리 서구식으로 바꾸려는 기획이 탄생했고, 유태인들은 바로 그런 기획의 첫 대상으로 선정되어 변화를 요구받았던 거예요. 서구인처럼 생각하고, 서구인처럼 행동하고, 서구인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서구인처럼 생기라는 요구를. 가령 이슬람교도들은 한 번도 그런 요구를 받아들인 적이 없는 반면 유태인들은 바로 그런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말살시킨 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1897년 친할아버지께서 동구에서 독일로 이민한 직후 찍으신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독일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셨어요. 어렸을 때 뵌 할머니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날 아랍여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셨지요. 머리에는 그 ‘악명 높은’ 머리스카프를 쓰셨고 옷차림도 요새 아랍여성들과 아주 똑같았거든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서는 완전히 지워진 역사입니다.
전승희 서구의 ‘계몽사상’이 서구인처럼 변화하라는 ‘호명’이라는 건 틀림이 없지요. 그리고 아랍 여성이 착용하는 차도르에 대한 최근 구미에서의 소동에서 보듯 서구인처럼 변화하는 지표의 하나로서 겉모습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외모의 지배체제’라고나 할까요?
라오르 맞아요. 히틀러의 전기를 보면 벨로루시를 방문하고 돌아온 히틀러가 기쁨에 넘쳐 “그 사람들이 우리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금발에 후리후리한 체격에”라고 말했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생각할수록 분명한 것이 유태인이야말로 식민화된 민족 중에서 자신이 식민화되었다는 의식조차 없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시오니즘의 아버지인 헤르첼의 『유태인의 국가』라는 책에 보면 아예 드러내놓고 “우리 유태인의 나라가 남쪽에서 진출하는 야만인들로부터 유럽을 방어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도 바로 그런 서구적 식민화에 대한 의지의 산물입니다. 식민화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한 것이지요. 그 점은 이스라엘의 미디어를 구미의 미디어와 비교 대조해볼 때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국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이스라엘 미디어는 구미 미디어의 논리를 거의 그대로 베끼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구미를 추종하는 것이 우리의 리비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 서구문명의 제국주의적 성격, 이스라엘 당국과 주류의 무분별한 서구추종에 대한 라오르 선생의 비판은 신랄했다.
라오르 서구는 근대 들어 한 번도 자신과 다른 것의 존재를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몽사상에 근거한 제국주의적 기획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로는 탈현대주의니 탈제국주의, 탈구조주의 등을 내세우지만. 한번은 런던에서 그 이름을 대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 만한 진보적 사상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화 중에 내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가 결혼을 비롯해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니까 그가 말하기를 ‘유태인의 문제는 유태인을 계몽사상으로 도약시킬 볼테르 같은 사상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서구 계몽사상의 문제점에 대한 최신 사상의 그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정말 믿기 힘들었습니다.
전승희 동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서구의 식민화대상으로 보신다는 관점이 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지에 선생님의 작품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작가들의 작품을 싣는다는 사실에 유태인이든 아니든 놀라움을 표시하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과연 이스라엘처럼 서구화된 나라를 아시아의 일부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죠.
라오르 지리로 보아도 그렇고 역사로 보아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있을까요? 작가로서 제게 구미의 독자들보다 아시아의 독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유럽의 매체에는 기고도 하고 미국이나 서구의 다른 나라들도 방문했지만 이스라엘 주변국을 제외한다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방문해본 적도 없고 그 문학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를 거치지 않은 아시아인끼리의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아시아》지의 기획은 정말 의미 있고 저 개인적으로도 반가운 일입니다. 아시아인들의 광범위한 호응으로 이 기획이 더욱 번창해서 구미의 담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구심점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전승희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말머리를 선생님 작품의 풍자적 성격으로 돌려볼까요? 단편 「역사에 관한 성찰」은 진지한 수필이나 논설의 형식을 패러디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주류의 논리를 전복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일용할 양식」 같은 시도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주기도문’을 패러디하면서 남성중심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모성성과 돌봄의 사상을 내세우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고요. 지배적 담론을 빌려오되 비판적 시각을 통해 내부로부터 전복하는 형식이 문학적 언어에 대한 러시아의 학자 바흐친의 이론을 연상시키던데요.
라오르 바로 보셨습니다. 문학의 언어가 담론간의 상호조명이자 대화라고 보는 바흐친의 이론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다양한 담론을 한 문장으로 끌어안아 병치함으로써 그것들끼리 서로 조명하게 하고 비판하게 하는 것, 그러니까 현실을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제가 작품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형화된 지배적 담론을 이런 담론간의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면 지배담론의 일면적 성격을 폭로할 수 있지요.
전승희 그 같은 담론의 중요한 특징은 바흐친도 논했다시피 ‘웃음’인데요.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읽은 몇몇 시라든가 또 산문에서 ‘웃음’은 핵심적인 요소 같더군요.
라오르 제 생각에 우리의 ‘자아(에고)’는 최악의 이야기꾼입니다. 자아의 진지함은 이야기를 진부하고 지루하며 뻔하고 감상적이며 또 현학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이런 진지함과 책임감은 상대적으로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은 무책임하지요. 이 무책임한 욕망이 바로 풍자와 웃음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웃음이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진실된 전복의 세력이지요. 오늘날 구미의 문화가 이런 ‘웃음’의 활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은 가령 미국의 시트콤에서 독자의 웃음을 자연스럽게 창출하는 대신 ‘웃음 박스’를 통해 억지로 웃음을 유도하는 현상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한 가지 이데올로기로 획일화된 사회의 문화는 진정한 욕망과 웃음을 잃고, 웃음조차도 주류사회에 통합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식의 사회는 아무리 다양성을 내세워도 실은 전체주의적인 사회에 가깝습니다. 한 가지 이데올로기로 전체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이 간접화된 증거는 웃음박스만이 아니고 가령 미국의 주류 담론이 집착하는 ‘가족적 가치’가 실제 가족 내부가 아닌 투표함에서만 존재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승희 미국에서 텔레비전이나 다른 대중매체를 보며 늘 느끼던 것인데 아주 정확하고 예리한 지적이신 것 같습니다. 좀 진부한 질문을 드려도 된다면, 선생님 문학의 스승이나 모델로 어떤 분을 꼽을 수 있을까요?
라오르 소설가로는 발자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와 포크너 등을 들 수 있고, 극작가로서는 브레히트, 영화감독으로 고다르 등을 좋아합니다. 이런 대가들의 훌륭한 점은 그들이 정형화된 틀을 깨고 새로운 인물을 발명하고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출판시장과 대중매체가 이미 정형화된 인물을 대중의 구미에 맞게 포장만 새로 해서 제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인물과 이야기가 시장의 요구에 따라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러니까 인물과 이야기는 그 내용이나 깊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소비자를 위해 상업적으로 제조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공적인 담론은 피상적이고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것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아주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고 봅니다.
전승희 이스라엘의 작가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홀로코스트가 빠질 수 없겠는데요. 한 민족을 완전히 말살시키겠다는 어마어마한 범죄적 기획을 진보된 현대기술을 동원해 실행에 옮김으로써 6백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유태인을 학살한 이 사건이 유태인들과 인류 전체에 남긴 상처가 과연 치유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하면 마치 피해자를 비판하는 형국이 된 것 같아요.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모든 비판을 침묵시키는 면죄부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라오르 홀로코스트의 범죄성에 대해서야 그 누구도 이견이 있을 수 없겠고 그 실상을 변별적으로 밝히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연 누가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당시 ‘거기 없었던’ 사람들에 의해, 심지어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비판했던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에서 중요하게 대두한 것은 1980년대 말엽에 가서이고 그전에는 학살당한 유태인들을 창피스러운 친척 정도로 여겼습니다. 희생을 당했다는 사실이 곧 ‘약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져 가능하면 모른 척하려고 했지요.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자’였어요. 학교에서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히브리어가 모국어이고 홀로코스트를 겪은 후 이민 온 학생들은 히브리어가 서툴러서 서로 겉돌고 끼리끼리 따로 어울렸지요.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들어 이스라엘 정부에서 그들을 병합시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들을 위해서 말하다가 이어 그들의 대변인을 자처하더니 점차 우리가 곧 그들인 것처럼 자임하고 나선 것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모두 아우슈비츠로 수학여행을 갑니다. 독일 정부가 이스라엘 정부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배상을 했고요. 희생당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배상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처음에는 무시당하고 이어 상징적 역할을 하다가 지금은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바뀐 셈입니다. 현재는 홀로코스트가 일종의 정치산업을 창출하는 중심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승희 1980년대 말 들어 이런 변화가 일어난 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라오르 이유야 분명한 것 아닐까요? 공산주의권이 존재할 동안에는 구미에서 서방은 선이요 공산주의 동구권은 악이라는 도식이 가능했는데,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지고 나서 더 이상 그런 도식이 성립되지 않게 되었거든요. 이제 모두가 선이고 악은 나치에게서만 그러니까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선하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은 선한 일입니다. 이라크를 침공해서 대량살상을 하든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을 침공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든. 나치가 한 일에 비할 바가 못 되니까. 구미인들이 더 이상 내부의 선악을 구별하고 싶지 않은 세계에서 홀로코스트가 아주 기묘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승희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 구미, 특히 미국의 주류세력이 ‘역사의 종언’을 공언하고 인류에게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굴면서 기고만장해진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동구권이 무너지기 전에 이루어졌던 진보적 개혁이 상당 정도 후퇴했고, 이라크 전쟁이나 이란, 북한 등을 상대로 한 위협을 보더라도 이것이 결코 바람직한 변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지요. 바로 이것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의 배경이기도 하다는 지적은 새롭지만 설득력이 있군요.
홀로코스트의 짐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 미국인인 루스 클루거가 최근 발표한 자서전에서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미국 유태인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많은 미국 유태인들이 자신들이 유럽에 두고 온 부모와 가족이 희생당한 데 대한 죄의식을 현 이스라엘 정부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으로 보상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스라엘 정부의 침략성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큰형 노릇을 해주는 것이 큰 문제임이 분명하기에 이스라엘인인 라오르 선생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라오르 미국의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칭찬할 만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도울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돈과 여유가 있어 이스라엘을 방문한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미국 유태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해 대중매체나 이스라엘 정부를 지지하는 특정단체가 제공한 것 이상의 지식이 없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 현실을 잘 모르면서 이스라엘 정부나 그와 가까운 매체나 단체의 말만 듣고 같은 민족에게 도움이 되라고 돈을 기부하는데, 바로 그 돈이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도 살상하는 데 사용되는 겁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 정부발행 채권은 외국 채권 중 유일하게 미국의 세금을 면제받는 혜택을 받고 있고요. 미국 내 유태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외람됨을 반성해야 합니다. ‘거기 있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돕는 것은 쉽지만 그게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전승희 이스라엘 정부의 침략성과 억압성은 규탄해 마땅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테러를 내놓고 옹호하는 하마스가 집권을 했는데요.
라오르 저도 물론 테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독립된 국가와 정부를 인정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상태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팔레스타인 집권세력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가 그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하는 악순환을 낳고 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우려할 상황입니다.
전승희 하지만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내부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선생님이나 다른 양심적 지식인들이 일신상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아 노력하고 있으니 그러다 보면 이런 난관이 타개되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갈 수 있겠지요. 선생님께서 2년 전 창간해서 편집하고 계시는 잡지 《미타암:문학과 급진적 사상 리뷰》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잡지에 대해 《아시아》의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해주시면 좋겠군요.
라오르 ‘미타암’이라는 제호는 원래 제 아내가 제안한 것인데 발음상으로도 좋고 의미도 이 잡지의 성격에 맞습니다. ‘미타암’에서 ‘미’는 ‘……로부터’라는 뜻이고 ‘타암’은 미각, 취향 등을 뜻하는 말인데 두 단어를 합성하면 중세 히브리어로는 ‘……로 인해’라는 뜻이 되고, 현대 히브리어로는 ‘……를 위해서’라는 뜻이 됩니다. 앞서 이스라엘에서 정치적인 성향의 문학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존재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단어를 내세움으로써 의도적으로 그런 경향에 도전하는 의미가 있지요. 잡지에는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사고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과 에세이 등을 모아 싣고 있는데 국내외 독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8호를 인쇄소에 보냈는데 구체적인 숫자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정기구독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 실린 에세이들을 모아 영역해 출판하자는 제의를 받고 작업 중이기도 합니다. 해외의 구독자 수도 국내 독자 수와 맞먹는 수준이니까 해외의 많은 유태인들이 종교나 국가, 학계와는 거리를 둔 우리 잡지를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 매체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승희 선생님과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선생님을 놓아드려야 할 것 같네요.(웃음) 장시간 좋은 말씀 주신 데 대해 《아시아》의 독자와 편집진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독일에서의 남은 일정 동안 선생님의 창작에 아무쪼록 좋은 결실 있으시기를 빕니다. 건강하십시오.
라오르 저도 모처럼 관심과 뜻을 함께하는 아시아의 동지를 만나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잡지 《아시아》의 사업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미타암》과 《아시아》 사이에 더 깊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아시아》가 대안적 담론의 생산에 큰 역할을 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먼 길 안녕히 가십시오.
















